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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문서행정과 인장

심맥부지 2023. 12. 13. 17:10

관인 글자와 문양을 통해 본 신라의 문서행정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관인 글자와 문양을 통해 본 신라의 문서행정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개인, 단체의 이름을 문서에 찍기 위해 만든 인장(印章) 또는 도장은 기원전 5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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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이동주. 2020. 신라(新羅)의 문서행정(文書行政)과 인장(印章). 『영남학』 75:117-148.

개인, 단체의 이름을 문서에 찍기 위해 만든 인장(印章) 또는 도장은 기원전 5천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현재에도 사용되는 유서 깊은 도구다. 한반도에는 기원전에 전래된 것으로 보고된다. 고대 인장은 신분을 보증하는 물건으로 대외활동 수행시 필수적으로 패용해야 하는 물건이었으며, 문서에 날인되어 내용의 신뢰성과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기능을 한다.

경북대 인문학술원 이동주 HK연구교수는 현전되는 신라 인장 26점과 문헌자료 2건을 상세히 살펴 신라 인장을 분류하고, 그 기능을 추정한다. 특히 관인(官印)으로 보이는 6점의 인장을 통해 통일신라 시기 행정 체계와 인장의 연관성을 살핀다.

 

글자와 문양 남은 인장 16점

전래되는 신라 인장은 1975년 경주 월지(안압지) 등 경주와 삼천, 이천, 양주, 대구 등 지방에서 출토된 실물과 월지에서 출토된 전돌 바닥에 인장이 찍힌 기와, 『고려사』에서 확인되는 자료까지 전체 26점이 전한다. 이중 인문(印文∙인감에 새겨진 글자)가 쓰인 인장은 13점으로 1자에서 6자까지 글자가 남아 있다. 대부분이 16점이 경주, 왕경 특히 월지에서 출토되었고, 지방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인장은 산성에서 발굴되었는데 인장 면(印面)에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어 특징적이다.

출처: 이동주, 2021.

인장은 왕이 사용하는 국새, 관청이 사용하는 관인, 개인이 사용하는 사인으로 구분되나, 현전하는 신라 인장 중 국새는 없으며 대외적으로 사용되는 외관인과 내부 관청에서 사용되는 경관인으로 구분된다. 관인은 관의 급수나 직책에 따라 크기를 달리해 만들어져 권위를 부여했다. 현전하는 신라 인장은 크기가 거의 유사하고, 印이나 短文으로 끝나는 경우가 다수다. 따라서 손잡이와 재질이 인장 유형 구분에서 중요해진다.

문서 행정과 관련된 것은 전체 중 6점은 ‘之印’이라 쓰여 있고 패용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손잡이가 달린 구리 재질을 띤다. 남궁지인(南宮之印), 청금지인(靑幢之印)이라 적혀 예부나 군부대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고, □현촌현지인(□玄村縣之印)은 고유명사로 현, 촌 행정단위 말단이라 볼 수 있다. 사찰인 황룡사지와 역명 사지에서 출토된 승관인(僧官印)은 승정 관련 업무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중앙에서 지방까지 일원적 문서 행정에 이용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행정체계가 구조화되고 중앙으로 집중되는 양상을 띠었다. 국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상부의 정책 결정이 지방 말단까지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했고, 이에 따라 문서주의에 기반한 관료제가 발달했다. 서류로 만들어진 공문서는 구두 전달보다 정확하며, 문서에 인장을 날인해 신뢰성을 부여하고, 개변을 방지할 수 있다.

출처: 이동주, 2021.

신라는 문무왕대에 이르러 전국가적 차원에서 관인을 반포했다. 문무왕 9년 이후 하교(下敎), 유조(遺詔), 교서(敎書) 등로 왕의 명령이 정형화된다. 문헌과 관련해서도 적어도 중대부터 일정한 양식에 입각한 문서주의를 채택해 문서를 통해 행정을 일원화하려는 의지가 보인 것이다.

신라 인장 중 기하학적 문양을 띈 것이 상당히 많다. 삼척 흥전리에서 ‘梵雄官衙之印’과 기하학적 문양 두 종류의 인장이 출토되었음을 감안하면 문서 행정에서 두 인장이 모두 필요했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기하학적 문양의 인장이 내용을 보증하기 위해 봉함하는 데 쓰이거나 문서가 길어진 경우 하나임을 표시하기 위해 연결면에 인장을 찍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양 인장이 지방 행정의 거점인 산성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아 지방의 문서 행정에 있어 중요한 도구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