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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신라, 천년고도의 민낯과 마주하기

심맥부지 2023. 12. 13. 17:14

‘천년왕국’ 신라, 천년고도의 민낯과 마주하기 - 교수신문 (kyosu.net)

 

‘천년왕국’ 신라, 천년고도의 민낯과 마주하기 - 교수신문

[천하제일연구자대회 60 신라 왕경 연구]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아마 유년시절 기성복 광고였을 것이다. 당시 인기 절정의 배우가 LP판을 들고 재즈음악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었다.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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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60 신라 왕경 연구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2를 시작하며_우리 학술장의 ‘소통 공간’ 함께 키워 갑시다)

 
신라 왕경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있다. 
궁역의 내부 구조가 어떠했는지, 도시구획의 범위는 어디까지였는지, 
왕경의 관리 관부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수도방위와 각종 군사시설은 어떠한 양상을 띠었는지 등의 실마리를 잡기 어렵다. 
왕경 연구는 문헌자료만으로는 한계가 크다. 
고고학·지리학·생태학·지질학 등 학제 간의 성과를 통섭하게 될 때 
좀 더 선명하게 경관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아마 유년시절 기성복 광고였을 것이다. 당시 인기 절정의 배우가 LP판을 들고 재즈음악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었다. 광고의 배경이 된 뉴욕 맨해튼의 야경은 너무나 황홀했다. 때마침 여물 끓는 냄새에 외양간의 암소가 구슬프게 울었다. 방문을 열면 탁 트인 완산들이 눈앞에 펼쳐졌고, 황보 능문이 말목을 베었다는 금강성이 조망된다.

바라보고 있자니 광고 속 뉴욕과 도저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린 나에게 도시란 동화 속 상상의 세계와 큰 차이가 없었다. 아마 이러한 도시에 대한 동경이 도시사를 전공하도록 이끈 원천이 된 것 같다. 


뉴욕 맨해튼 야경이다. 사진=위키미디어
다양한 연구 방법론의 통섭

운이 좋게도 대학 학부시절 틈틈이 발굴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경주의 땅속에서 드러나는 유구와 유물들이 경이로웠다. 흙 묻은 토기나 기와 조각을 세척하며 신라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하였다. 경주 어디를 파더라도 기와는 반드시 출토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부유함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새마을 운동 노래 2절 가사에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란 구절이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초가집은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의 고려 개경,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을 보더라도 한양에조차 기와집이 흔치 않았다.   

우선 왕경의 경관을 복원하려면 학제 간의 성과를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예컨대 경주가 처한 자연지리적 환경의 분석, 문헌의 사료비판, 출토문자자료의 해독, 물질자료의 편년, 철학적 이념 등 다방면의 성과를 종합할 수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구슬을 꿰기 위해 다양한 기술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6년여 발굴기관에 종사하면서 발굴조사를 담당했다. 발굴 정황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언급함으로써 왕경의 대체적인 경관이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석 대상이 된 보고서는 2018년 기준 721건 천여 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분석 과정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천년왕국이라지만 대부분의 자료가 통일기의 것이었다. 다시 말해 상고기, 중고기의 자료는 거의 없는 셈이다. 결국 언제부터 경주분지에 인간이 살았는가의 문제와도 연동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경북대 사학과에서 「신라 통일기 왕경의 구조와 운영」(2018)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글의 중심은 통일기로 잡되 중고기 왕경을 전야로 다루었다. 사실 왕경의 변화상을 짚어 내기 위해서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변동을 유념할 필요가 있었다. 한 국가의 생장소멸은 지방이 진원지일지라도 중앙인 수도에 그 여파가 남을 것임이기 때문이다. 왕경을 살아있는 일종의 유기체로 보았을 때, 성장과정에서 겪는 흔적이 나무의 나이테에 남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사진 위 왼쪽부터 수막새 신라와전, 의봉사년개토 신라와전, 녹우귀면와 신라와전이다. 맨왼쪽 아래는 암막새 신라와전이다. 679년 문무왕의 왕경 일신을 증언하는 물질자료들(축척부동)이다. 사진=국립경주박물관, 2000, 『新羅瓦塼』
왕경이란 공간의 특수성

왕경(王京), 곧 수도를 의미하는 한자의 용례를 범박하게 보면 경(京), 도(都), 사(師)로 수렴된다. 문헌에 보이는 京은 ‘크다’, ‘인위적으로 아주 높게 만든 언덕’이란 의미를 가진다. 때론 ‘천자의 거소’를 말하기도 한다. 都는 어조사이지만, ‘종묘가 있는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師는 ‘많다’, 혹은 ‘사람의 무리’라는 의미가 확인된다. 문헌이나 금석문에는 대부분 위 한자가 합성된 용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그 의미는 ‘천하의 중심이자 王者가 거주하는 곳이며, 궁과 종묘가 있고, 많은 사람이 무리 지어 있는 곳’이 된다. 그러므로 왕경은 국정을 총괄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적인 면에서 국가권력의 중핵을 이루게 된다. 

왕경은 인구의 밀집도가 높은 도시이다. 따라서 1차 산업보다 외부 의존적인 소비 형태를 보이며, 잉여생산물을 소비한다. 신라의 왕경은 진한의 소국이었던 사로국이 성장하면서 비롯되었다. 사로국은 6부의 영역인 셈이다. 신라가 중앙집권적 영역국가로 자리매김하면서 사로국이 왕경으로 전환되었다. 신라 왕경이란 사로국의 범위, 곧 6부의 영역에 다름 아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왕경의 범위를 두고 논의가 분분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왕도 범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차이이다. 현 경주 시가지는 사방이 도로로 구획된 블록화 된 공간이 확인된다. 이는 방리구획의 흔적이다. 당시 왕경의 번화가를 의미하며, 외곽의 배후지는 수공업 생산 공방들이 배치되어 왕경인들의 삶을 지탱했다. 따라서 왕경은 번화가와 배후지로 구성된 복합적인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통일국가의 수도로 새롭게 거듭나다

신라 왕경은 사로국의 국읍(國邑)에서 출발하여 국가가 멸망할 때까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공간에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누적됨에 따라 왕경의 변화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기를 구분하여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공간의 외적 변화를 초래한 요인으로는 중고기 마립간호의 사용, 불교 공인, 중대 유학적 정치질서, 당 문물의 수용, 무열왕계의 집권 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요소를 통해 당시 집권자들이 왕경을 통해 지배이념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는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나는 이러한 점을 고민을 했고, 나름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신라 왕경 구조의 시기별 재구성을 시도했다. 신라는 진한 소국인 사로국을 모태로 성장했다. 신라가 중앙적 영역국가로 성장했을 때 왕경의 구조는 그 전과는 차별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왕경이 천도의 과정이 없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무의 나이테처럼 인간의 흔적이 누층적으로 축적되어 있음을 전제할 수 있다. 시기별 건축물의 분포를 통해 인간의 활동 양상을 추론할 수 있는 정합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지배 이데올로기가 공간의 변화에 미친 영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라 중고기는 불교 이데올로기를 통해 왕자(王者)의 권위를 확보하였다. 왕이 곧 부처(王卽佛)라는 사상에 입각하여 보면 신궁을 포기하고 지은 황룡사 역시 왕궁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김춘추가 집권하면서 유학적 지배질서가 신라를 강타했다. 율령, 묘호제, 시호제, 동궁제, 종묘제, 국학 등 당 문물의 수용은 왕경의 외적 변화를 유도하였다. 이는 중고기 지배질서와는 분명히 차별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왕은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남면(南面)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월성은 남측이 하안단구여서 왕경의 확장 방향은 북쪽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 19년 당시 왕경의 토목공사를 증언하는 자료가 ‘의봉사년개토(儀鳳四年皆土)’명 기와이다. 이 기와는 절대연대가 확인되므로 문헌에 버금가는 파급력을 가졌다. 명문에는 연월일이 구체적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왕경의 대규모 공사에 앞서 길일을 가려 뽑은 셈이다.

그럼에도 왕경은 유교적 예제에 맞는 공간배치가 어려웠고,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 기획은 이로 말미암은 듯하다. 그러나 천도 역시 무위로 돌아갔고, 신라의 왕들은 기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선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 했던 것 같다.

셋째, 신라 왕경의 운영에 대한 고찰을 하였다. 왕경은 자연 촌락과 달리 소비 중심의 도시이며, 신라 국토 전체를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사방으로 곧게 뻗은 도로는 지방의 물자가 수렴되는 공간이자 동시에 중앙의 명령이 하달되는 교차점이라는 이중성을 가진다.

왕경의 주변에 배치된 특수 수공업촌락 성(成)·향(鄕)은 물품을 생산하여 왕경인들의 삶을 지원하였다. 이는 후대 고려의 향·소·부곡의 원형이 된다. 왕경은 시가지와 떨어진 외곽 공간에 매연이나 소음이 발생하는 공방을 배치하여 각종 물품들을 제작했던 것이다.   


왕경은 인구의 밀집도가 높은 곳, 곧 도시를 말한다. 주로 자체생산보다는 외부 의존적인 소비 형태를 보인다. 국가권력의 중핵을 이루며 국정을 총괄하는 곳이다. 신라 왕경의 전성기 복원도는 월상루에 오른 헌강왕과 민공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사진=경상북도
천년왕국의 빛과 그림자

2019년 11월 19일 김석기 국회의원(경주)의 발의로 천년고도 신라 왕경의 8대 핵심 유적을 복원·정비하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정비복원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신라 왕경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다만 신라 왕경을 두고 8세기경 최고 번성기에 인구 100만 명이 넘었다든지, 경주는 179만 호가 거주한 장안(중국), 콘스탄티노플(동로마) 바그다드(이라크)와 함께 세계 4대 고대 도시로 꼽힌다는 주장은 사실과 달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신라 전성기 왕경을 회자할 때 헌강왕과 민공 사이의 대화가 곧잘 인용된다. 월상루에 올라서 본 서울의 전경은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헌에는 경사(京師)에서 해내(海內)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문헌에 보이는 178,936호란 규모는 인구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왕경의 전성기와 관련해서 운집한 기와집과 숯을 회자하곤 한다. 그런데 이 기사는 왕경의 그림자로 보인다. 500톤의 숯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백탄은 2천톤, 흑탄은 1천500톤의 목재가 소비된다. 4인 가족 한 끼 식사를 만드는데 필요한 숯은 200g이다. 17만 호를 인구수로 감안하더라도 한 끼 식사에 8.9톤의 숯이 소비된다. 왕경은 흡사 숯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을 연상시킨다. 사실 연료의 무게를 줄이는 목적은 원거리 수송이 전제된 개념이다. 이를 통해 왕경 주변의 숲이 상당히 황폐화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기와는 교체 시기가 대략 100년이다. 왕경 전역에 기와가 올려졌다면 기와를 생산하던 와공은 일제히 실업 상태에 직면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와공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일본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전한다. 869년 5월 26일 무츠국(陸奧国)에 리히터 규모 8.3에 달하는 사상 최악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 결과 국분사, 국분니사 등 사찰과 무츠국 관청 등 주요 시설이 초토화되었다.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시설 재건을 위해 기와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 일본을 오가던 신라 와공들은 무츠국 수리부에 배치되었다. 생계를 위해 일본을 오가던 와공들이 기와를 생산하는 본업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이름이 전해진다는 점에서 이들은 왕경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일 가능성이 높다. 왕경의 전성기를 전하는 숯과 기와 기사가 역으로 신라의 멸망을 보여주는 전조라면 과한 추정일까. 

신라 왕경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있다. 궁역의 내부 구조가 어떠했는지, 도시구획의 범위는 어디까지였는지, 왕경의 관리 관부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수도방위와 각종 군사시설은 어떠한 양상을 띠었는지 실마리를 잡기 어렵다. 사실 왕경 연구는 문헌자료만으로는 한계가 크다. 고고학·지리학·생태학·지질학 등 학제 간의 성과를 통섭하게 될 때 좀 더 선명하게 경관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동주 경북대 인문학술원 HK연구교수
경북대에서 한국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라 왕경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문헌사학과 고고학을 융합해 왕경의 구조, 문서행정, 생산시설의 운영 등 구체상을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출토문자자료 분석에 관심을 가지고 성과를 내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新羅의 文書行政과 印章」(영남학75, 2020),  「신라 동궁의 구조와 범위」(한국고대사연구100, 2020), 「경산 소월리 출토 목간과 유구의 성격」(동서인문16, 2021)등이 있다. 저서로 『신라 왕경 형성과정 연구』(2019, 2019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한국목간총람』(2022, 공저, 2022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등이 있다. 역서로는 『지하에서 출토된 문자』(2022), 『목간에서 고대가 보인다』(2022, 공역) 등이 있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